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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문헌 목록 〉23. 23世 〉34. <부정공>죽포공휘기영행장(竹圃公諱基永行狀)
1. 문헌 목록 〉23. 23世 〉36. <부정공>유헌공휘찬영가장(幽軒公諱贊永家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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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부정공>율정공휘인영가장(栗亭公諱縯永家狀)
栗亭公諱縯永家狀 府君諱縯永字聖希初諱敬洙栗亭其號也我趙肇於高麗侍中諱璋三傳諱元吉以定策勳封玉川君子孫同籍焉時生諱瑜官副正入我 朝屢徵大官不就三傳諱智崙四昆季友愛尤篤世所稱相好亭也又三傳諱大春與河西玉峰兩先生友善寔府君十三世以上也高祖諱載根以孝著曾祖諱騏燁祖諱敏奎考諱鍾華俱有隱德妣昇州朴氏海龍女所生考諱鍾閏妣慶州金氏時瓘女府君以 高宗辛未十月八日亥時生于本第天性仁愛年甫十二失慈母出爲季父后而季父只有一女而早歿府君事偏母以孝愛幼妹以道感動鄉隣又與本生伯季友愛切至而李氏偶被橫厄事係本邑故晨夕發程左周右旋遂解其事翌一午后始歸家此時府君連日焦思且日奇甚寒行至深峽飢渴滋甚不省人事委諸道己而似有人跡府君乃喉中强言曰我非病客因飢氣塞願救我酒店其人果負背上導之酒店府君飲畢己久始得回甦而還常常致意曰吾被活恩於人然第當其時有何精神問其姓名耶問酒母亦不知云云所以無路報恩一生缺然者耳自是以後季氏移居于酉興山中伯氏亦出丁仲父后而早歿是故生庭侍奉無以出后而有間柔色婉容承順無違至於喪葬几筵三年如一日而奉之且生庭稚妹三人撫之養之及長婚嫁如儀又與從伯竹圃先生相友無異弟兄有敎必從有疑必問事無大小必爛議而行之是故眷顧而至有其生朝分土之惠甞戒不肖曰爲人之道在於學問不學則類墻面耳故自不肖之在髫齡也至于成長常招延師長往受業焉文房具少無闕焉或從事於畝畝則必責之曰凡事不專一則不成况讀書乎一切家務俾勿干涉至於爲學一節常切切戒之曰根本固然後枝葉長追遠報本之道尤當盡心今田園所收實果用之有限以奉祀事無乏焉又善於謀忠見人有急必出力以周之曾有養從弟枉被禁錮府君出百金而贖之以兔其厄再犯亦如之又溺於外遊久而不返撫其家屬視同一己非但府君爲然也母夫人亦爲矜惻故家無喧嘩之聲耳平日未明而起盥漱衣冠無偃臥困疲之態而至夜乃脱衣冠聰明絶人雖無筆蹟經年往事燎然一貫矣歲自乙酉十一月偶吟呌楚之感日甚一日竟以十月二十一日丑時下世春秋七十五鳴呼痛哉越三日葬于栗木嶝先山下亥原己而己丑十二月十二日遷窆于鳳田村右又以丙午十二月十六日遷于月燈林村前圓峰壬坐原配豊川任氏泰俊府君一年五月十六日生先府君三年十二月一日卒壽七十一墓鸛峰壬原端正有壺儀事舅姑以孝事君子以禮惡言不出於口邪色不現于形甞戒不肖曰勤實讀書以副門戶之望親爲紡績維持產業生一男四女男即不肖也陽川許樺昌寧曺圭煥木川張炳鉉興德張基鎬壻也孫光潤長澤高永孝妻外孫許孝錫曺基敏基萬基永基烈基鳳基成基雄張吉洙泳孝張曾植也餘不盡錄鳴呼哀哀父母敎子血誠眞天地感動鬼神亦知故其言曰有利於學問雖賣衣買之吾所不辭也其意深矣不肖非無此心而素質庸陋立心不固以至今日無成就以副先考平日責望之意眞天地間一罪人耳餘何可論涕涙零零不知所言玆草言行梗槩以俟知德者考焉 不肖子 東勳 敬狀 율정공휘인영가장(栗亭公諱縯永家狀) 부군의 휘는 연영(縯永)이요 자는 성희(聖希)며 초휘는 경수(敬洙)인데 율정은 그 호이다. 우리 조 성은 고려국 휘 장(璋)에서 비롯하여 삼전하여 휘 원길(元吉)은 정책훈공으로 옥천군이 되니 자손이 관향을 삼았으며 생휘 유(瑜)는 벼슬이 부정으로 이조에 들어와 자주 대관으로 불러도 나아가지 아니하였고 삼전하여 휘 지윤(智崙)은 四형제 우애가 독실하니 세상에서 일컬은바 상호정이었다. 삼전하여 휘 대춘(大春)은 하서(河西) 옥봉(玉峯) 양선생으로 더불어 착한 벗이 되었으니 곧 부군의 十三세 이상이었다. 고조 휘 재근(載根)은 효행이 있었고 증조 휘 기엽(麒燁) 조 휘 민규(敏奎) 고 휘 종화(鍾華)는 함께 숨은 덕이 있었으며 비는 승주(昇州) 박씨(朴氏) 해룡(海龍)의 따님이요 소생(所生) 고의 휘는 조응(鍾閨)이며 비는 경주김씨(慶州) 시환(時瓘)의 따님이다. 부군이 고종(高宗) 신미(辛未 一八七一)년 十월 八일에 출생하였는데 천성이 어질고 자애롭더니 나이 겨우 十二세에 자친을 잃고 계부 후사로 출계하니 계부가 다만 딸 한 사람만 두고 일찍 별세함에 부군이 편모를 효도로서 섬기고 어린 누이 동생을 도리로서 사랑하여 고을과 이웃을 감동시키고 또 본생 형제로 더불어 우애가 지극하며 계씨가 우연을 해결하고 다음날 오후에 집으로 돌아오던 중 부군이 몇일을 마음을 태우고 날씨마져 심히 추웠던 관계로 깊은 골짜기에 당도하자 기갈이 몹시 심하여 인사를 살피지 못하고 길가에 쓰러져 버렸다. 얼마 후 인기척을 듣고 부군이 안간힘을 다하여 겨우 내가 병객이 아니라 굶주린 나머지 기운이 없어 그러니 나를 좀 술집으로 데려다주시오 하자 그 사람은 곧 부군을 등에 업고 주점으로 갔다. 여기에서 부군은 술을 마신 뒤에 회생하여 돌아오셨다. 항상 치의하여 말하기를 내가 사람에게 활은을 입었으나 그 당시에 무슨 정신이 있어 그 성명을 물었겠는가 주모에게 물어도 또 알지 못한다 하니 보은할 길이 없어 일생 결연할 뿐이라 하시었다. 이 뒤로부터 계씨는 유흥 사늣甘으로 이거하고 백씨 또 중부흐사로 출계하여 일찍 별세하니 생부모의 시봉을 양자 갔다고 해서 사이를 두지 않고 안색을 부드럽게 하고 얼굴을 화하게 하여 순하게 이어 어김이 없고 초상 장사 령위를 三년을 하루같이 받들었으며 또 어린 여동생 삼인을 잘 보살펴 주었고 장성함에 예의에 따라 출가시켰다. 또 종백 죽포 선생으로 더불어 서로 친형제 같이 우애하여 그의 가르침을 반드시 순종하였으며 의심스러운 일이 있으면 반드시 물어 행하는 등 일의 대소를 막론하고 언제나 합의하여 시행했던 까닭에 그를 후하게 도와 주었고 그 환갑때 분토의 은혜가 있었다. 일찍 나를 훈계하되 사람된 길이 학문에 있으니 배우지 아니하면 사람된 도리를 모른다 하시고 불초가 七〜八세로 부터 성장할 때까지 항상 선생을 모셔 배우게 하고 지필묵을 부족하지 않게 해 주었으며 어쩌다 농사일에 손을 대면 반드시 책망하여 일을 전일하게 아니하면 이루지 못하는 법인데 하물며 학문에 있어서이겠느냐 일체 집안일을 간섭말고 학업을 성실이 하라 말씀하시고 또 경계하되 뿌리가 굳은 연후에 지엽이 무성하니 멀리 추모하고 근본 갚은 도리를 더욱 마땅히 다하여라. 이제 전원에서 거둔 과실이 봉제사에 모자라지 아니하리라. 또 모충을 잘하여 사람의 급난을 보면 반드시 힘을 다하여 규휼하였다. 일찍 양 종제가 억울하게 금고형을 당하자 부군이 백금을 내서 속환토록 해주었고 두번째 범하였을 때도 마찬가지로 구해주었다. 또 멀리나가 돌아오지 아니하니 그 가족을 동기같이 보살펴 주었다. 부군만 그런것이 아니라 모부모인도 그들을 가엽게 생각한 고로 집안에 불평이 없었다. 평소에 새벽에 일찍 일어나 의관을 바르게 하고 종일토록 단정히 앉아 있어도 피곤한 태도를 짓지 않았고 있다가 밤이 된 뒤에야 의관을 벗었으며 그의 총명이 뛰어나 비록 기록이 없으나 지난일을 빠짐없이 기억하고 있었다. 을유(乙酉)년 十一월에 병을 얻어 마침내 十월 二十一일에 춘추 七十五세로 별세하시니 아! 슬프다 三일이 넘어 율목등 선산아래 해원에 장사하였다가 기축(己丑)년 十二월 十二일 봉전촌 위에 옮겨 모시고 또 병오(丙午)년 十二월 十六일에 월등 두리봉 임좌에 옮겨 모셨으며 부인은 풍천임씨(豊川任氏) 태준(泰俊)의 따님으로 부군보다 一년후 一월 十六일에 출생하여 부군 三년먼저 十二월 一일에 춘추 七十一세로 졸하니 묘소는 황새봉 임좌고 단정한 규범이 있어 시부모를 효도로서 섬겼고 부군을 예로서 대하고 모진말을 입에 내지 아니하며 간사한 빛을 얼굴에 나타내지 않고 일찍 불초를 훈계하되 근실히 글초 동훈(東勳)이요 딸은 양천허화(陽川許樺) 창녕조규환(昌寧曺圭煥) 목천장병현(木川張炳鉉) 흥덕장기호(興德張其鎬) 처며 손자는 광집(光集) 광식(光植) 광윤(光潤) 장택고영효(長澤高永孝) 처고 나머지는 다 기록 아니한다. 아! 슬프고 슬픈 우리 부모 자식을 혈성으로 가르침에 천지가 감동하고 귀신이 또 아는고로 그 말씀에 학문에 유리하면 비록 의복을 팔아도 사양하지 아니한다 하시었으니 그 뜻이 깊으도다. 불초가 이런 마음이 없는 것이 아니라 본시 바탕이 용열하고 세운 마음이 약하여 아직껏 성취하지 못하여 선고가 평일에 책망한 뜻을 맞춘것이 없으니 참으로 천지간에 한갓 죄인이라. 여타에 무엇을 가히 의론하겠는가. 눈물이 가로막아 말할 바를 알지 못하고 이에 대강 언행을 초하여 덕을 아는자의 고증을 기다림. 불초자(不肖子) 동훈(東勳) 삼가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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